* 한병철, 한병기 공저'칼의 역사와 무예-독행도(獨行道)'에서 발췌

 하루 8시간의 중노동. 그 대가로 주어지는 핸드폰과 자동차와 같은 사치품. 간간이 얻어지는 시간을 통해 가는 스키장. 왜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하고 누구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 봤자 결국 얻어지는 것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불안감이며 소외감뿐이다.
 이제 재벌의 편의대로 평범한 서민들은 언제든지 교환 가능한 부속품에 불과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작동만 하다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부속품.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한다. 겨우 생활이 가능한 돈을 벌며, '그래, 나도 이런 것들을 가질 처지가 되었어'하며 가끔씩 가지는 비싼 물건들로 자위를 한다.
 돈 되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지금, 나는 자신의 반성을 이야기하고 수행을 이야기하려 한다. 돈이 안되는데 왜 반성과 수행을 하며, 또 수행이란 무었일까. 인간은 항상 조건 지워진 존재이다. 종교의 속박, 이데올로기의 속박에 얽혀 살아야 하고 현대에는 매스컴의 세뇌까지 견뎌야 한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조건들을 자각하고 벗어날 수는 없을까. 과연 그런 속박을 벗어난 자우의 경지는 있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경제적 논리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부족하지만 더 '좋은'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고,타인에게는 배려와 아량을 베풀고 싶다. 이런 이상을 향해 가는 것을 나는 수행이라고 보며, 이 책은 나를 속박하는 조건들과 한계를 하루하루 까달아 가려는 나의 일지록(日知錄)인 셈이다. 이런 수행의 한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나에게는 검도였다. 폭넓게는 무술, 좁게는 검도를 해서 얻는 가장 좋은 점은 나의 한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면, 자신감과 여유가 생기고, 다음의 목표가 생긴다.
 이 글은 한병철이라는 한 인간이 검을 통해서 이상을 향해 가려 했던 기록이다. 검(劍)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어떻게 접근하려 했는지, 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의 방편이 될 수 있는지, 경험적인 또는 연구했던 것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검도라는 단어에 검뿐 아니라 도(道)라는 글자도 붙는다며, 검 수련을 통해서도 도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구체적인 길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도는 불교의 수행처럼 좌선을 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가? 검을 수련해서는 옛 성인들이 이르렀던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일까? 아마 이런 질문을 검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일까?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연마하면서, 살인 기술을 통해 도에 이르겠다니, 이것은 대단한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굳이 살인 기술에 "도(道)"자를 붙이는 것일까? 총을 쓰는 사격술이나 동물을 도축하는 기술에는 '도'자를 붙이지 않는데, 왜 무술에서만 도를 언급하는 것일까? 현대의 검도 - 어떤 검도 단체가 되었던간에 - 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 방편에 관해 속시원하게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검을 통해 가는 길은 바로 '심검(心劍)'에 이르는 길이다. 심검이란 검술의 수행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 더 이상 물리적인 칼이 필요없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칼이란 물건은 이제 관념 속에서만 그 가치가 있으며, 적이 없으므로 칼도 검술도 필요가 없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이 길을 통해서 붓다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검은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것인가? 아직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검을 통해 가는 길은 이제는 내 눈에 보인다. 이 글을 보고 오히려 미혹에 빠지고 길을 못 찾아서 헤매는 사람이 당연히 생기겠지만, 그런 부작용보다는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미숙한 나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지금 전통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통적이지 않은 것은 곧 민족적 이단자로 인식되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문화라는 깔대기로 여과시켜 버리며, 무술까지도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실용적 목적에서 시작된 무술이 문화적 현상으로 변이한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접근방식이다. 무술은 문화가 아니며, 실용주의의 정수인 것이다. 문화 - 춤, 음악, 음식- 는 '문화적 원리'가 지배하지만, 무술은 '실용주의의 원리'가 지배한다.
 무술을 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면서부터 무술은 도(道)와 멀어져 벼렸고, 무술 본래의 색깔을 잃어 버렸다. 현재 벌어지는 마녀재판같은 무술의 전통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무술에는 전통이 없는데도 전통논쟁을 시작했다는 것은, 무술 연구의 접근방법이 출발부터 일탈된 채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을 강요당하는 이 시대에 무술까지도 덩달아 고생한다 아니할 수 없다. 검술은 검의 목적과 원리에 충실할 때, 거기에 검의 길이 있고, 그것이 검도(劍道)이다.
 검을 통핱 깨달음은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총체적인 것이다. 일반인은 무술 수행의 목적을 아마도 건강에 둘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절대다수가 이런 목적에서 무술을 수련한다. 무술의 목적이 호신이거나 건강과 정신수련이거나 간에 양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승 무공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양상의 목적이 아닌 ' 무술의 목적'에서 무술을 시작하게 된다. 무술의 목적이란 적을 잘 죽이는 방법에 다름 아니다.
 우리 속담에 '십년공부'라는 말이 있다. 십년을 공부하면 무너가 되는 모양이다. 그만큼 한가지를 오래 가지고 오랜 동안 연구하고 숙달하면 그 분야에 도가 트는 모양이다. 도가 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문고의 도는 거문고를 잘 연주하는 것이 첫 번째 순서이며, 스키의 도는 스키를 잘 타는 것이 우선이다.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나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은 자신의 분야에 '도가 통한'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가 통했다는 건 결국 자신이 선택한 도구의 역할에 충실하여 기술의 숙달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리라. 그 도구가 좌선이든 가야금이든 간에.
 그렇다면 검의 도는 무엇인가? 검은 사람 죽이는 도구이다. 장검을 가지고 과일 깎을 수 없으며, 가을추수 때 낫 대용으로 쓸 수 없다. 일차적인 검의 길은 '사람을 잘 죽이는데'있다. 검의 길, 즉 검도는 사람 죽이는 기술의 연구에 방법의 우선순위가 있어야 할 것인데. 따라서 여기서 활인검이나 마음의 수양을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무술인들은 잘 죽이는 기술에 도가 트기도 전에 마음의 수양과 도(道)를 이야기 한다. 한 마디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이다. 검의 도가 뭔지 알고서나 하는 소리인가?
 나는 검의 길을 가면서 검의 구조와 역사를 먼저 연구했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상승검법의 가능성과 방법론을 찾았다. 그리하여 적을 잘 죽이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탐구하고 시도한 결과, 아이러니킬하게도 결국 양생의 차원으로 회귀하게 된다는 것이 상승무공에 대한 나의 주장이며, 검술을 통해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길에 대한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 일반 무술: 양생의 목적 → 양생의 목적에 도달
 - 상승 무공: 무술의 목적 → 양생의 목적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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