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홍 저 '바람의 사부-후기'에서 발췌   

                                   무맥은 사라지지 않는다.

 태초에 사람이 있었다.
 원시 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왔다.
 싸움이란 빠르고 느림, 힘이 세고 약함, 수가 적고 많음, 세력과 술수, 병기의 날카롭고 둔함, 그리고 본능적인 상황과 이성적인 상황에의 적응과 부적응이 확연히 대비되는 한 판의 승부이다. 승자와 패자는 늘 구분되었고, 때로는 숱한 목숨들이 걸리기도 했다.
 군집의 생활 이전, 사람은 모두 야수와 같았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사람은 짐승의 틀에 한 거죽 더 응용이란 탈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사람에게 호신의 기법과 방법을 전하는 다양한 무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그래서 무맥의 발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조그만 위성인 지구 어디에서건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회발전의 역사가 아무리 빨라도 원류는 변하지 않는다.
 그 가장 큰 흐름이 도구를 통한 무의 번성이다.
 칼과 활, 창과 봉, 쇠몽둥이와 사슬, 그리고 주변의 잡다한 생활물자들의 사용법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전되었다. 기법의 풍요만큼이나 도구의 종류도 늘어났다. 민족간, 국가간의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에 기름을 부어넣 듯 무의 진화를 촉진시켰다.
 또 하나 숨겨진 것이 바로 비(非)도구의 무이다.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육체능력을 최대화, 극대화하려는 의지는 손과 발,무릎과 가슴, 어깨와 머리, 등판 등을 사용하는 몸체 외부의 공부로부터 장기와 근육, 경락, 경혈경맥 등에 대한 끊임없는 인체탐구로 이어졌다.
 이 두 흐름은 필요에 다라 교묘히 접합되어 "무"란 단일의 주제 속에서 항상 독립되거나 혼재되는 과정을 거쳐왔다. 이 땅의 무맥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민족의 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은 우선 이 땅의 역사가 가진 독특한 경로를 추적하지 않고서는 해답을 찾기 어렵다. 단편적으로 볼 때, '도구와 비도구'의 무맥 분류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이 땅의 무학이 전수와 전승을 노출시키지 않고 이루어져 온 현상임을 간과해선 안된다.
 예컨대 삼국시대 이후 통일 신라가 등장하자 무가 숭상되기 보다는 문의 역사가 본류로 등장했다. 그 속에서 관에 의해 주도된 이른바 관무를 제외하고는 무학자의 후계전승이 대부분 이름 모를 스승과 사부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례가 많다. 혹여 사부를 안다 해도 전승자인 보인이 가지는 선대 스승과 동일한 어려움 때문에 이를 발설치 않고 무덤길을 선택하는 예가 대부분이었다.
 여타의 기예 분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에서 이 땅의 무맥이 가진 술, 예, 도는 단맥되기도 재현되기도 하는 과정을 겨쳐 오늘에 이른다.
 본시 이 땅의 뭇학은 은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면면히 이어온 민초의 생명력, 생존수단이기도 했다. 스승은 제자와 무란 공통인수만을 공유할 뿐이지 인맥에 따른 파벌이 생성되길 원치 않았다.
 동양에서 일본과 중국이 자신의 문파를 앞세워 경쟁을 거듭할 때에도 이 땅의 무맥은 늘 전승된 본신(本身)의 무맥을 이어가고 발전시키는 일에 치중할 뿐이었지 그것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살법과 활법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죽이고 살리는 법과는 다르다. 무학 본래의 위력은 형(型) 뿐만 아니라 수련을 통해 범인이 가지 못하는 경지로 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운용의 법이 나온다. 칼만 해도 부엌에서 쓰면 평범한 도구이지만 강도가 사용하면 곧 흉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법을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지킴이'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이 땅의 무맥은 모든 명칭이 제각각 틀리지만 어김없이 '산수련'이란 과정을 가진다는 점을 보라. 동양 어느 곳에서도 무으 단련에서 산을 이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곳은 드물다.
 기법과 기술 차원의 무학이 아니라 자연과의 동화를 통해 무의 본질인, '사람이 있어 사람의 자연이 되고, 자연에서 사람을 찾는' 태초 인간의 순수함을 이 땅의 무맥이 찾고 잇는 것이다. 한 그루 나무도 그저 치고 베는 대상이 아니라 숲을 이루는 한 생명으로 대할 줄 안다. 이것이 이 땅의 무학이며 무맥의 본(本)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땅은 참된 인간을 발견할 수 있는 이처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그만큼 외세의 압력과 투쟁을 거듭하는 악순환의 역사고리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남북한 분단이 그러하고 앞으로 닥칠 다음 세대의 변화도 예측난망하기 그지없다.
 그 속에서 무맥도 자꾸만 무관심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전수와 전승이란 성스러운 의식도 도시하와 상업화에 밀려 인생의 참다운 계승의 의미를 잃고 기술과 기법의 복제에만 치중하고 있다. 새대의 변화가 선대 지킴이들의 가이없는 고심을 수용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 무학의 상당수는 관무에 해당한다.
 관무는 시대의 변화로, 칼,창과 같은 재래식 무기를 누르는 총, 대포 등 신병기의 도입과 함께 역할을 점차 잃어갈 입장이었다. 고유의 역할이 사라지지 않도록 온전히 보존하는 것은 결국 전임시대의 몫이기도 했다.
 일제 삼십육년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일본과 한반도에는 지금도 늘 애증이 교차한다. 역사의 운명적 수레바퀴가 항시 서로를 맞물리게 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엽까지의 일본은 우리의 관무일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서양의 문물과 함께 총포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우리는 그간 지켜온 무맥의 계승도구를 제대로 전승시킬 틈도 없이 박탈당하고 말았다.
 민초 무맥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무맥들이 나라의 존망을 이유로 분분히 지사의 대열에 참여했다. 그들 중엔느 전승자고 두지 못하고 자시느이 무학 일맥을 고스란히 단절시킨 사람들도 흔했다.
 사십여 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은자의 세계에서 엄격한 선대의 율법에 따라 움직이던 많은 지킴이들이 사라졌다. 개중에는 겨우 몸을 보전하여 전수자를 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대의 변화와 격동으로 누대(累代)에 씻을 수 없는 단절의 죄를 짓고 죽어갔다.
 본래 민초 무맥은 진정한 계보를 마련하기가 불가능하다.
 구전과 체득을 기본으로 한 전수와 전승의 율법은 까다롭기 그지없고 철저한 약속으로 진행되기 일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20세기 초엽까지 이 땅에 남아 있던 민초의 무맥은 몇 개의 대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간의 교류는 극히 제한적인 범주에서 알려져 있으나 그 또한 불분명하다. 현재도 그들 일맥이 전승되고 있을 것임을 추측하긴 하나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기대하기 어렵다.
 택견의 경우가 그러하고 수벽치기의 예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그나마 여러 후인들이 평생을 건 재현의 노력으로 일정한 틀을 회복했지만 겨우 백년 이전에는 민초의 보편적인 무맥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불행한 것은 일제의 강제점령 시기가 끝난 수, 세계 초강대국간 냉전의 대리전쟁의 폭풍이 다시 한번 한반도를 휩쓴 일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남북한이라는, 676년 통일신라의 등장 이후 1200여 년 이래 최초의 분단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은자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맥을 보존할 대명은 차치하고 일신의 수호가 긴요한 상황이었다. 백두 대간을 축으로 면면히 이어온 무맥의 무형의 질서도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무인들은 더욱 신분을 속이고 남북한 모두에서 그리고 해외 곳곳으로숨어 들었다.
 그로부터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아지고 민초무맥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 땅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가잔 큰 복연을 놓치고 말았다. 금권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횡행하는 가운데 민초는 압사할 지경이다. 역사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소리 없이 빠른 속도로 흐르기만 하는데도.
 그래도 이 땅의 무맥은 살아 숨쉰다. 무학이란 소재는 잘못건드리면 그야말로 책을 일는 서너 시간의 심리적 가타르시스를 주는 무협소설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도 중요할 수는 있다.그렇지만 이 땅의 민초무맥은 가쉽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수와 전승'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들은 오늘도 지킴이 본래의 정신을 재현하려 애쓴다.
 스승과 스승의 스승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딜지 모를 역사의 뿌리가 있다. 나 한 몸이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닌 아비, 어미로 아어져온 본신을 타고났듯이 무맥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느 겨울날 새벽, 속초의 청간정에서 동해바다의 진은 먹구름으로 해돋이 보기에 실패하고서 돌아오던 길, 그날 오후 중천에 뜬 해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느꼈던 것 처럼 비록 감추어져 있지만 무맥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대감도 도무지 현실성도 없는 막연한 무협의 세계가 아닌, 바로 근년 우리 곁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하였다. 민족과 민속의 이름으로 교묘히 숨겨진 숱한 우리의 보물들 중에는 우리만의 고유한 무학이 있다. 생활 속에서 볼 수 없다 해서 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 곁에 머무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 글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나태한 무인의 실패사이며, 한편으론 아직도 희망을 쫓으며 스스로 포기란 말을 입에 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죄인의 고백 같은 글이다. 그는 말한다.
 '어디선가 다른 맥을 통해 민초의 무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기대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찾기 어려워져간다. 이 땅 위에 태어난 허다한 사람들 속에서 이런 일을 겪은 나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태어남이나 떠남이 모두 다르다. 이어지지 못한 인생이란 삶에 대한 배신이다.
 조용힌 은자의 세계에 머물던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천 배 만 배로 굴신해도 모자랄 전칭치 못한 죄업으로 죽는 날까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을 중심으로 무맥을 말함은 온당치 못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무맥은 원래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상시 주의 깊게 보지 않는 풍경들, 예컨대 숲과 나무, 산과 들, 혹은 도시의 조그만 도장이나 어린아이들의 걸음걸이, 뜀새, 춤사위에서 또는 텔레비젼의 연속극과 같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것은 민초가 가진 본래의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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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전수와 전승의 엄격하기 그지없는 율법을 준수하는 숱한 무맥의 지킴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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